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단 편집) === [[중국]]의 경우 === 한편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한 뒤 1년 내에 중국 국민당 치하의 타이완 섬을 점령하여 중국의 완전한 통일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래서 1950년 5월 국부군 양대 거점지 중 하나인 [[하이난]] 섬을 정복하고 최후로 10월에 대만 침공과 중국 완전 통일을 계획했지만, 공격 개시 넉 달을 남겨두고 김일성이 한국으로 쳐 들어가는 바람에 미국이 달려와서 '''대만 해협에 [[항공모함]]을 박아버렸다.''' 정확히는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려고 제7함대를 배치시켰는데 대만까지 작전 가능 범위가 닿은 것이다. 게다가 대만 침공에 사용하려던 병력과 장비도 북한군이 잘 나가던 초반부가 지나면서 전황이 영 안 좋게 돌아가자 북한을 돕기 위해 전용되었고 이들은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차츰 소모되었다. 그나마 미군과 UN군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제법 활약하면서 중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올라가기는 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장제스 정권에 학을 뗀 친중파 미국관료들이 중공을 승인해서 중국을 유고슬라비아처럼 만들려던 계획이 틀어졌다는 카더라도 있다. 즉 1950년도에 될 상임이사국 지위를 1970년 넘어서야 획득하고 미, 소 사이에서 3세계의 대장으로 결정권자의 역할을 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포기할 게 많았으니, 만약 중공이 북한을 방치하고 6.25 전쟁에 참전치 않았더라면 이미 대만까지 점거하여 벌써 완전한 중국통일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더 빨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어 현재보다 더 빨리 강대국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25 전쟁이 없어도 당시 조건으로는 중공이 대만까지 쳐들어가기 어려웠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중공군은 이미 전에 [[진먼]] 상륙작전에서 패배했던 바가 있다. 이후 전력을 가다듬고 다시 준비하긴 했는데... 해군력 부족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상대인 국민당군 역시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도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는데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일본 제국 해군]]하고 싸우다 전력의 대부분이 날아갔다.] 진먼 전투 때에도 일단 목제 범선 같은 거라도 타고 바다를 건너서 상륙하는 것 자체까지는 가능했다. 만약 해군력을 제대로 갖춘 미국이 개입한다면 중공군은 상륙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냥 해상에서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인 학살극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였다는 건 대만 문제에 개입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6.25 전쟁이 없이 계획대로 대만을 공격한다고 가정했을 때 최악의 경우, 중공군 정예부대가 미 해군에 의해 해상에서 섬멸당하고, 그 빈틈을 타서 국민당군이 대륙수복을 시도할 수도 있게 된다. 한반도 전쟁 덕분에 중국은 미국이 동북아 정세에 개입할 의사가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승산이 전혀 없는 해상이 아니라 그나마 싸워볼만한 육상에서 미국과 겨루게 되었으며, 무리한 대만 공격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다만, 6.25 전쟁보다는 명분성이 떨어지고 국민당이 보여줬던 실책 때문에 미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6.25 전쟁만큼 높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6.25 전쟁 당시 UN군에 대해 겉으로 보기엔 대등 혹은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오른 면이 있었으며, 이는 후에 중국이 [[UNSC|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대만에서 빼앗아 오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침략자 북한 편을 들었던 것 때문에 침략자로 규정되어 몇십년 간 서방을 위시한 국제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은 면도 있다. 또한 국공내전 당시 생포한 국민당 포로 출신들을 전장에 투입하여 정리했고 UN군에게 잡힌 중국군 포로들 중 국민당군 출신들은 거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1당 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원래 북한을 밀어주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간도]]의 지배권을 북한에게 넘겨주려다 북한이 전쟁에서 지자 중국에 줘버렸다는 설도 있다. 또한 국민당 포로들은 다시 이득을 보려고했던 장제스에 의해 중화민국군으로 다시 참전한다. 후에 이것 때문에 한국이 대만에게 단교 후에도 꼼짝 못하는 이유가 된다. 대만이나 중국 양안 모두 어쨌든 6.25 전쟁에 병력을 파병했다. 중국은 인민해방군 120만명을, 대만 역시 대만국적의 화교들 중심으로 200명을 파병했다. 인민해방군은 10만명이 전사하고 대만군 역시 40명이 전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